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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의 역사와 우리나라에 미친 영향

by 아뜰리에띵 2025. 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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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리학의 시작과 완성(북송·남송시대, 11~12세기)

성리학은 중국 북송 시대에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나라 말기와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를 거치면서 유학은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아 쇠퇴하고 있었는데, 이때 송대의 학자들은 유학을 재정립하기 위해 기존의 경전 해석에서 벗어나 철학적 개념과 도덕적 원리를 체계화하기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과 우주의 원리를 탐구하는 사상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주돈이(周敦頤)라는 학자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저술하며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고, 이 태극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주의 근본 원리를 설명하였습니다. 또, 정호(程顥)는 '정주학(程朱學)'의 기초를 마련하여 인간의 본성과 천리(天理)를 탐구하였습니다. 

 

성리학이 정통 유학으로써 자리를 잡은 시대는 바로 12세기 남송 시대입니다. '주자'라고도 불리는 '주희'라는 학자가 이전 학자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성리학을 완성하였으며, 그의 학문은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에서 정통 유학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주희(주자)는 '이(理, 우주의 원리)'와 '기(氣, 물질적 요소)'의 개념을 정립하여 모든 사물의 본질을 설명했고,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참된 앎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핵심 경전으로 삼고, 이를 해석하여 '주자학(朱子學)'을 확립하였습니다. 이 성리학은 원나라 때 공식적인 학문으로 인정받았으며, 이후명·청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2. 성리학의 확산과 쇠퇴(원·명·청 시대, 13~19세기)

원나라는 몽골족이 통치하던 국가로 원래 불교와 도교를 숭상하였는데, 성리학 또한 중요한 학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과거제에서 성리학이 필수 과목이 되면서 한족(漢族) 지식인들 사이에서 성리학이 더욱 확산되었고, 이후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성리학이 국가의 이념으로 자리를 잡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명나라 때에는 성리학이 국가 통치 이념으로 자리 잡았고, 성리학적 윤리를 바탕으로 가정과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문화가 형성되며, 『사서대전(四書大全)』 등의 성리학 관련 서적도 편찬되었습니다. 그러나 명대 후반에 지나치게 형식화되면서 학문의 경직성이 문제로 지적되었고, 이에 반발하여 양명학(陽明學)이 등장하게 됩니다. 

 

청나라 시대에는 고증학(考證學)이 등장하며 기존 성리학의 이론적 기반이 약화되었습니다. 청나라 말기에는 서양 문물이 유입되면서 성리학의 영향력이 크게 줄어들었습니다.  

 

3. 성리학이 조선에 미친 영향

성리학은 고려 말(13~14세기)에 원나라를 통해 유입되었으나, 불교가 여전히 국가 이념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불교의 폐단이 비판받으면서 성리학이 개혁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조선 건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조선 초(15세기)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은 성리학을 국가 통치 이념으로 확립하였으며, 세종대왕 시기에는 집현전을 통해 성리학의 연구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성종(15세기 후반) 때,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면서 성리학적 질서가 법제화되었고, 성리학은 조선 사회의 근본 이념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16세기에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같은 성리학자들이 등장하여 성리학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으며, 이들은 각각 이기론(理氣論)의 연구를 심화시키면서 학파를 형성하였고, 이후 조선 사회의 기본 철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성리학은 점차 교조화되고 경직된 상태로 변질되게 됩니다. 특히, 예송 논쟁과 같은 학파 간의 분쟁이 심화되면서 실질적인 개혁보다는 이념적 논쟁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지자 '실학(實學)'이 등장하여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성리학은 여전히 조선 사회의 근본적인 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에 서구 열강의 침략과 개화 사상이 유입되면서 성리학 중심의 전통 사회는 흔들리게 되었고, 갑오개혁 이후 본격적으로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가 도입도면서 성리학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의 윤리관과 전통적 가치관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문화적 기반으로 남아 있으며, 교육과 가족 윤리, 유교적 예절 속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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